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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철학 및 인문학 이야기

결정장애로 괴로운 당신에게,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라는 형벌'

by 생각 발전소 2025. 7. 25.

결정장애로 괴로운 당신에게,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라는 형벌'

오늘 점심 메뉴는 무엇으로 할지, 주말에 어떤 영화를 볼지, 혹은 어떤 옷을 입고 나갈지와 같은 사소한 선택 앞에서 우리는 종종 머뭇거립니다. 더 나아가 진로 선택, 결혼, 이직과 같은 인생의 중대한 기로에 서면 그 고민의 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집니다.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길을 잃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 우리는 이를 '결정장애'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만약 이 고통스러운 무력감이 단순히 개인의 우유부단함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떨까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그는 우리 인간이 '자유라는 형벌(condemned to be free)'에 처해있다고 선언합니다. 이 역설적인 문장을 통해, 우리는 결정의 고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실존적 해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존주의의 문을 연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사르트르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사상적 기반인 '실존주의'를 알아야 합니다. 실존주의의 핵심 명제는 바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전통 철학에서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장인이 종이칼을 만든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는 종이칼의 용도, 모양, 재질 등 '종이칼의 본질'을 머릿속에 먼저 구상한 뒤, 그 구상에 따라 실제 종이칼, 즉 '실존하는 종이칼'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본질은 실존에 명백히 앞섭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에게는 이러한 정해진 '본질'이 없다고 말합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유신론적 관점을 거부한 그는, 인간이 어떠한 목적이나 설계도 없이 이 세상에 그냥 '내던져진(thrown)'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미리 주어진 인간성이나 본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세상에 존재(실존)하고, 그 이후에 자신의 삶을 통해, 즉 자신의 수많은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만들어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창조해야 할 책임을 지닌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졌다": 이 역설의 의미

이러한 실존주의적 인간관에서 사르트르의 가장 유명한 명제,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졌다"가 탄생합니다. 왜 하필 고귀한 가치인 '자유'가 '형벌'이라는 부정적인 단어와 결합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자유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완전한 책임'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창조하도록 선고받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신, 운명, 사회, 유전, 심지어는 '나의 성격'과 같은 것들 뒤에 숨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은 곧 '나는 이런 사람이 되겠다'는 선언이자, 더 나아가 '인간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인류 전체에 대한 제안이 됩니다. 내가 비겁한 선택을 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비겁한 사람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비겁함을 인류의 가능한 모습 중 하나로 제시하는 셈입니다. 이처럼 나의 모든 선택이 나 자신과 인류 전체의 모습을 조각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그 선택의 무게는 실로 엄청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가 주는 불안, 즉 '앙스트(Angst)'입니다.

선택의 무게, 앙스트(Angst)

사르트르가 말하는 앙스트는 단순히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공포가 아닙니다. 이는 자신의 자유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그에 따르는 막중한 책임감을 직시할 때 느끼는 현기증과도 같은 감정입니다. 정해진 길이나 정답이 없다는 사실, 나의 모든 발걸음이 새로운 길을 만드는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깊은 불안에 휩싸입니다. 결정장애의 본질은 바로 이 앙스트를 회피하려는 시도일 수 있습니다. '최선'의 선택, '실패하지 않는' 선택을 찾으려는 집착은 사실 이 책임의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다른 표현인 셈입니다.

신이 없는 세상의 고독(Forlornness)

사르트르는 또한 우리가 '고독' 속에 버려져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고독은 단순히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물리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줄 신이나 절대적인 도덕률이 부재한다는 형이상학적 고독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에 대한 해답은 어디에도 미리 적혀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서 스스로의 가치와 도덕을 발명해야만 합니다. 이 끝없는 막막함이 바로 우리가 느끼는 실존적 고독입니다.

결정장애, 현대인의 보편적 고통이 된 이유

사르트르의 철학은 반세기도 더 전에 나왔지만,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결정장애의 심리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소비의 영역에서는 수만 가지 상품이, 직업의 영역에서는 무수히 많은 진로가, 삶의 방식에서는 각양각색의 라이프스타일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자유가 커지는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선택의 고통과 책임의 무게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여기에 소셜 미디어(SNS)는 끊임없이 타인의 '완벽해 보이는' 선택과 그 결과를 전시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성공적인 삶, 행복한 휴가, 멋진 성취를 보며 나의 선택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검열합니다. '혹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더 나은 선택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FOMO, Fear Of Missing Out)'은 우리를 더욱 마비시킵니다. 이처럼 현대 사회의 풍요와 연결성은 오히려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 형벌을 더욱 가혹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자유라는 형벌을 '선물'로 바꾸는 법: 사르트르의 제안

그렇다면 우리는 이 결정의 고통 속에서 영원히 허우적거려야만 할까요? 사르트르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우리가 이 형벌을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라고 촉구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기기만(Bad Faith)'에서 벗어나기

사르트르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기만(mauvaise foi)'에 빠진다고 비판합니다. 자기기만이란,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자신을 하나의 사물이나 정해진 역할처럼 여기는 태도입니다. "나는 원래 성격이 내성적이라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나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야" 와 같은 말들이 바로 자기기만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외부 요인이나 자신의 '본성' 탓으로 돌리려는 비겁한 시도입니다. 결정장애 역시 "나는 원래 우유부단한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며 선택의 책임을 유예하는 자기기만의 한 형태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자신이 모든 선택의 유일한 주체임을 온전히 인정해야 합니다.

'앙가주망(Engagement)'을 통한 실존의 창조

자기기만에서 벗어났다면, 다음 단계는 바로 '앙가주망(Engagement)', 즉 참여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에게 중요한 것은 완벽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택이든 스스로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그 선택에 온전히 자신을 던져 책임을 지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총합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며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 비로소 만들어집니다. 최선의 선택을 찾기 위해 망설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설령 그 선택이 실패로 이어진다 해도, 그 실패를 겪고 책임지는 과정 역시 '나'를 구성하는 소중한 일부가 됩니다. 가치는 선택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체적 선택과 헌신을 통해 비로소 창조되는 것입니다.


형벌을 넘어, 창조의 기쁨으로

우리가 겪는 결정장애의 고통은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는 '자유라는 형벌'의 무게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그 형벌을 저주가 아닌,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바라볼 것을 제안합니다. 세상에 '정답'은 없으며, 최고의 선택이란 우리가 선택하고 책임짐으로써 비로소 '최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을 짓누르는 선택의 무게 앞에서,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떤 선택이 가장 옳을까?"가 아니라, "나는 어떤 선택을 통해 나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싶은가?"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