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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철학 및 인문학 이야기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

by 생각 발전소 2025. 7. 26.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일까요, 아니면 악한 존재일까요?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철학자, 사상가, 그리고 우리 보통 사람들을 괴롭혀 온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이 오래된 논쟁의 중심에 고대 중국의 두 거인, 맹자(孟子)와 순자(荀子)가 서 있습니다. 그들은 혼란의 시대였던 춘추전국시대를 살아가며 인간 본성에 대한 전혀 다른 해답을 내놓았습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순자는 반대로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습니다. 이 두 관점은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 인간의 가능성, 교육의 역할, 그리고 사회 질서의 근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맹자와 순자의 사상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그들의 흥미로운 고찰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시대적 배경: 춘추전국시대, 왜 인간 본성이 화두가 되었나?

맹자와 순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극심한 혼란과 전쟁의 시기였습니다. 주(周)나라의 권위가 무너지고 수많은 제후국이 패권을 다투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기존의 사회 질서와 윤리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사람들은 배신과 음모, 잔혹한 살상이 만연한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사상가들은 '어떻게 이 혼란을 끝내고 안정된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절박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한 근본적인 탐구는 자연스럽게 인간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인간이 본래 선하다면 그 선함을 어떻게 회복하고 확충할 것인가? 만약 본래 악하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 악함을 제어하고 교화할 것인가? 인간 본성에 대한 규정은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첫 단추였던 셈입니다.

맹자의 성선설: 인간은 본래 선하다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맹자는 혼란의 원인을 인간 외부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며, 사회의 혼란은 그 선한 본성이 가려지고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맹자는 인간이 선하다는 근거로 그 유명한 '사단(四端)'을 제시합니다.

사단(四端)의 발견: 선함의 증거

맹자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네 가지 실마리, 즉 '사단'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각각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입니다. 측은지심은 타인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사양지심은 겸손하게 양보하는 마음이며, 시비지심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맹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비유를 듭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려는 아찔한 순간을 목격한다면, 그 누구라도 깜짝 놀라며 아이를 구하려는 마음이 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아이의 부모와 잘 아는 사이라서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함도 아니며, 아이를 구하지 않았을 때 들을 비난이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계산 없이 순수하게 우러나오는 마음, 즉 측은지심이며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맹자는 역설했습니다.

선한 본성의 확충: 사덕(四德)으로 나아가다

맹자에게 사단은 씨앗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싹을 잘 가꾸고 키워나갈 때, 비로소 완성된 덕(德)이 열매를 맺는다고 보았습니다. 측은지심을 확충하면 인(仁)이 되고, 수오지심을 확충하면 의(義)가 되며, 사양지심을 확충하면 예(禮)가 되고, 시비지심을 확충하면 지(智)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덕(四德)입니다.

따라서 맹자에게 교육과 수양의 목표는 없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면에 존재하는 선한 본성(사단)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확충)이었습니다. 그는 올바른 정치가 백성들이 이러한 선한 본성을 잃지 않도록 돕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왜 악한 사람이 존재하는가?

성선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세상에 왜 악한 사람이 존재하는가?'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맹자는 소가 풀을 뜯어 먹는 우산(牛山)의 비유로 답합니다. 본래 아름다운 나무로 울창했던 우산이 매일같이 도끼로 베어지고 소와 양의 먹이가 되어 민둥산이 된 것처럼, 인간의 선한 본성 역시 척박한 환경이나 잘못된 욕심에 의해 지속적으로 훼손되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악한 사람은 본성이 악해서가 아니라, 선한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순자의 성악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맹자와 같은 유학자이면서도, 순자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는 춘추전국시대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며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악하다고 규정했습니다. 그에게 사회 혼란의 원인은 바로 통제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였습니다.

본성과 위(僞): 인위적인 노력의 중요성

순자는 인간의 '성(性)', 즉 타고난 본성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남을 시기하며, 감각적인 쾌락을 좇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다툼과 혼란, 무질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습니다. 순자에게 인간의 본성은 교정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순자 사상의 핵심 개념인 '위(僞)'가 등장합니다. '위'는 거짓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인위(人爲)', 즉 인간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을 뜻합니다. 순자는 선(善)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학습과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본성은 악하지만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선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성기위(化性起僞): 본성을 변화시켜 선을 이루다

순자의 철학은 '화성기위(化性起僞)'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본성(性)을 변화시켜(化) 인위(僞)를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그는 구부러진 나무를 곧게 펴기 위해 찜통에 찌고 틀에 넣어 바로잡는 과정에 비유했습니다. 아무리 구부러진 나무라도 인위적인 노력을 가하면 곧게 만들 수 있듯이, 이기적인 본성을 지닌 인간도 교육과 수양을 통해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선(善)은 자연 상태가 아니라, 인간 문명의 산물이자 노력의 결과입니다. 맹자가 선한 본성의 '보존'과 '확충'을 강조했다면, 순자는 악한 본성의 '교화'와 '교정'을 통해 새로운 선을 '창조'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스승과 예(禮)의 역할

본성을 교정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순자는 스승(師)의 가르침과 예(禮)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스승은 구부러진 나무를 펴는 목수와 같고, 예(사회규범, 법, 제도)는 나무를 곧게 펴는 데 사용되는 틀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악한 본성을 극복하기 어려우므로, 성인(聖人)이 만들어 놓은 예라는 객관적인 기준과 스승의 지도를 따라야만 비로소 질서 있고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선설과 성악설, 단순한 대립을 넘어선 공통점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 본성에 대한 출발점에서 극명한 대립을 보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와 방법론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이는 두 사상이 단순히 대립하는 것을 넘어 서로를 보완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첫째, 두 사상가 모두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맹자는 선한 본성을 잘 키우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순자 역시 악한 본성을 노력으로 교정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출발점은 달랐지만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인 신념을 공유한 것입니다.

둘째, 둘 다 후천적인 학습과 수양, 즉 노력의 중요성을 절대적으로 강조했습니다. 맹자에게는 선한 싹을 덕으로 키워내는 노력이 필요했고, 순자에게는 악한 본성을 선하게 바꾸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인간이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타고난 본성이 어떻든, 그것을 갈고닦는 과정 없이는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적 의의: 오늘날 우리는 이 논쟁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수천 년 전의 이 논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아이들의 내재된 선함과 호기심을 믿고 자율성을 존중하는 맹자적 접근을 따라야 할까요, 아니면 아직 미숙한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엄격한 규칙과 훈육을 강조하는 순자적 접근이 더 효과적일까요?

사회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법과 제도를 최소화하고 시민들의 양심과 자발적 참여를 믿는 공동체를 지향해야 할까요? 아니면 인간의 이기심을 전제하고 강력한 법률과 처벌, 감시 시스템을 통해 질서를 유지해야 할까요? 아마도 정답은 이 두 관점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데 있을 것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순자의 성악설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제도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이 두 거인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냐는 단정적인 답을 내리기보다, '어떻게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고민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본성에 대한 물음, 그리고 우리의 선택

맹자는 인간 내면의 선한 씨앗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내라고 말했고, 순자는 인간 본성의 거친 재료를 인위적인 노력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선을 창조하라고 역설했습니다. 이 두 위대한 사상은 인간 본성에 대한 대립된 시각을 제시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교육과 수양이라는 인간의 의지적 노력을 통해 누구나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해답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삶과 우리 사회는 맹자의 믿음에 더 가까운가요, 아니면 순자의 통찰에 더 의존하고 있나요?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는 과정이야말로 우리를 더 깊이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