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의 질문으로 본 우리 사회의 공정성
우리 사회에서 '공정'과 '정의'만큼 뜨거운 화두가 또 있을까요? 우리는 일상에서부터 사회 전체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공정함에 대해 질문하고 때로는 분노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갈증 속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등장해 한국 사회에 거대한 담론의 장을 열어준 책이 있습니다. 바로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정의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했던 정의의 개념들을 뒤흔들고,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우리를 깊은 사유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이 글에서는 샌델이 제시하는 정의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이를 거울삼아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마주한 공정성 문제를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샌델의 날카로운 질문들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통찰을 줄 수 있을까요?
정의를 바라보는 세 가지 렌즈: 공리, 자유, 그리고 미덕
샌델은 복잡다단한 정의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핵심적인 틀을 제시합니다. 바로 공리주의(Utilitarianism), 자유주의(Liberalism), 그리고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에 기반한 접근법입니다. 이 세 가지 관점은 각각 정의를 실현하는 목표를 다르게 설정하며, 서로 충돌하고 보완하며 논의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1.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공리주의적 접근
가장 직관적이고 실용적으로 들리는 관점은 바로 공리주의입니다. 제러미 벤담으로 대표되는 이 사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의 최고 원칙으로 삼습니다. 어떤 정책이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것이 사회 전체의 행복, 즉 '공리(utility)'를 얼마나 증대시키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금을 거두어 사회 기반 시설을 만들거나 복지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일부의 재산을 가져가지만, 사회 전체의 행복 총량을 늘리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리주의는 비용과 편익을 계산하여 정책적 결정을 내리는 데 강력한 논리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샌델은 여기에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행복이나 가치를 단일한 척도로 측정하고 계산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더 중요한 것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권리나 존엄성을 희생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고대 로마에서 다수의 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소수의 기독교인을 사자에게 던지는 행위가 공리주의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비판은 이 관점의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냅니다.
2.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라: 자유주의적 접근
공리주의의 약점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자유주의적 접근입니다. 이 관점 안에서도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첫째는 개인의 소유권과 선택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입니다. 이들은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개인이 자신의 신체와 재산에 대해 완전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부자에게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조차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강제 행위로 간주합니다.
둘째는 이마누엘 칸트로부터 시작되는, 보다 엄격한 도덕적 기반을 가진 자유주의입니다. 칸트에게 정의란 행복의 극대화나 결과가 아닌, 행위의 동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서 스스로에게 부여한 도덕 법칙, 즉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비로소 자유롭고 도덕적이라고 보았습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그의 말처럼, 칸트에게 정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조건 없이 존중하고, 개인을 결코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인권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강력한 철학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3. 미덕을 기르고 공동선을 추구하라: 공동체주의적 접근
샌델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루며 자신의 입장에 가깝게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관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뿌리를 둔 이 접근법은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해당 사회적 행위의 '목적(telos)'을 먼저 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목적론적 정의'입니다. 최고의 플루트는 누구에게 돌아가야 할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부유한 사람도, 가장 잘생긴 사람도 아닌, '플루트를 가장 잘 연주할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플루트의 목적은 탁월하게 연주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사회로 확장하면, 정의란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공동선(common good)'을 바탕으로, 공동체가 존중하고 장려하고자 하는 '미덕(virtue)'을 기르는 방식으로 재화나 명예를 분배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정의는 가치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삶의 방식이 더 좋은 삶인지, 우리 공동체는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토론이 필수적입니다. 샌델은 우리가 이러한 도덕적 논쟁을 회피할 때, 정치는 기술적이고 관리적인 문제로 전락하고 공동체 의식은 약화된다고 경고합니다.
샌델의 거울에 비친 우리 사회의 자화상
샌델이 제시한 세 가지 관점은 비단 철학적 논의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첨예한 사회 갈등을 분석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능력주의'라는 이름의 신화와 그늘
현대 사회, 특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믿음 중 하나는 바로 '능력주의(Meritocracy)'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공정하다는 믿음입니다. 이는 표면적으로 매우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샌델은 이를 '능력주의의 폭정'이라 부르며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성공이 과연 온전히 개인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지 묻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운, 타고난 재능과 같은 '운'의 요소를 배제할 수 있을까요? 샌델은 능력주의가 성공한 사람에게는 오만을, 실패한 사람에게는 굴욕감을 안겨주며 사회적 연대를 파괴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공이 전적으로 나의 공이라는 믿음은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약화시키고, 실패가 나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생각은 패배자를 더욱 깊은 나락으로 빠뜨립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극심한 입시 경쟁과 학벌주의,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승복 없는 갈등은 바로 이 능력주의 신화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줍니다.
소수자 우대 정책은 공정한가?
대학 입시나 채용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소수자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은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주제입니다. 이 문제를 샌델의 틀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에서는 이는 명백히 불공정합니다. 개인의 인종이나 배경이 아닌, 오직 능력과 자격으로만 평가받을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사회 전체의 다양성을 증진시켜 교육적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장기적으로 사회 통합에 기여한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샌델이 강조하는 공동체주의적 관점에서는 질문의 초점이 달라집니다. "대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 공동체는 대학을 통해 어떤 미덕을 기르고자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만약 대학의 목적이 단순히 학문적 탁월함의 추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미래의 시민 지도자를 양성하고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소수자 우대 정책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논쟁은 개인의 권리 문제를 넘어, 우리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적 목적에 대한 논쟁인 셈입니다.
답이 없는 질문, 그러나 멈출 수 없는 대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명쾌한 하나의 정답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며, 정의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공리, 자유, 미덕이라는 세 가지 관점은 서로 경쟁하며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게 만듭니다.
샌델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시민적인 참여'입니다. 정의에 대한 논쟁을 회피하지 말고,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어떤 가치를 함께 공유하고 키워나갈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숙고하자는 것입니다. 진정한 정의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더 나은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과정이자 대화 그 자체일지 모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모습이며, 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오늘 어떤 대화를 시작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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