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것마저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
세상의 모든 무게가 나 혼자만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나아갈 힘도, 나아가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모든 것을 놓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웁니다. 잠에서 깨어 눈을 뜨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과업처럼 느껴지고, 숨 쉬는 것마저 버거운, 그런 깊은 무력감의 늪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세상은 종종 너무나 쉬운 위로를 건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다 잘 될 거야”, “힘내”와 같은 말들 말입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 속에서 이러한 조언들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릴 뿐, 때로는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심한 말처럼 느껴져 더 큰 괴리감과 외로움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만약 여기, 당신의 그 깊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 말하며 정면으로 마주한 철학자가 있다면 어떨까요?
‘염세주의 철학자’라는 꼬리표로 유명한 아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삶이 본질적으로 고통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냉철하고 정직하게 파헤쳤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철학이 주는 위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대신, 그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진단하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해법을 처방합니다.
오늘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당신을 위해, 쇼펜하우어가 진단한 고통의 본질과 그가 제시하는 세 가지 단계의 해법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절망의 한복판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기이하고도 심오한 위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냉철한 진단과 평온을 위한 처방
1. 고통의 진단: 맹목적인 ‘살려는 의지(Will-to-Live)’
우리는 왜 고통받는가? 쇼펜하우어의 진단은 명쾌합니다. 바로 우리 존재의 근원에 있는 맹목적인 ‘살려는 의지(Wille zum Leben)’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인적인 의지나 이성적인 결단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성도, 목적도 없이 그저 끊임없이 살고, 번성하고, 욕망하기를 추구하는 거대하고 비합리적인 힘입니다. 이 맹목적인 생명의 의지는 우주 만물, 즉 해를 향해 자라나는 식물부터 먹이를 쫓는 동물, 그리고 복잡한 욕망을 가진 우리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근원적인 동력입니다.
이 ‘살려는 의지’가 왜 필연적으로 고통을 낳을까요?
그 이유는 의지의 본질이 바로 ‘결핍’과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의지는 항상 무언가를 원하고, 갈망하며, 그것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 만약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겪습니다.
- 만약 욕망이 운 좋게 채워지더라도, 그 만족감은 지극히 찰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금세 새로운 욕망을 품게 되거나, 더 이상 욕망할 것이 없는 상태, 즉 ‘권태(Boredom)’라는 또 다른 형태의 고통에 빠져듭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을 유명한 시계추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고통과 권태라는 두 극단 사이를 영원히 왕복하는 시계추와 같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시계추가 고통에서 권태로, 혹은 권태에서 고통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이 진단은 지독하게 비관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위로의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당신이 지금 겪는 고통이 당신만의 잘못이나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즉 ‘살려는 의지’의 노예로 태어난 모든 존재가 겪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조건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라는 고독한 자기 비난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습니다.
2. 첫 번째 해법: 예술을 통한 ‘의지’로부터의 잠시적 해방
그렇다면 이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일까요? 쇼펜하우어는 몇 가지 단계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예술을 통한 해방’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거나, 장엄한 교향곡을 듣거나, 깊이 있는 시를 읽는 순간을 떠올려보십시오. 그 순간, 우리는 경이로움에 압도되어 잠시 ‘나’ 자신을 잊게 됩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미적 탐구(Aesthetic Contemplation)’의 순간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눈앞의 대상을 ‘나의 욕망과 관련된 것’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즉, ‘저 그림을 갖고 싶다’거나 ‘저 음악이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까’와 같은 이기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그저 순수하게 대상을 관조하는 ‘의지 없는 순수한 인식의 주체’가 됩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살려는 의지’의 활동이 일시적으로 멈춥니다. 욕망과 결핍의 수레바퀴가 멈추고,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던 시계추가 고요히 멈춰 섭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인과율의 법칙에서 벗어나 완전한 객관성의 상태에서 깊고 평온한 안식을 얻습니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모든 예술 형식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다른 예술이 이념이나 개념을 매개하는 반면, 음악은 ‘살려는 의지’ 그 자체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모방하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슬픈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단지 슬픔을 느끼는 것을 넘어, 고통이라는 우주적 의지의 본질 자체를 느끼며 심오한 위안을 얻게 됩니다.
지금 당장 실천하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억지로 기운을 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대신,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틀거나, 아름다운 그림이나 사진 한 장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세요. 아무런 목적 없이, 판단 없이, 그저 순수한 관조자가 되어보십시오. 그 짧은 순간의 평온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작은 틈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3. 두 번째 해법: 타인의 고통을 통한 ‘동정(Compassion)’
예술을 통한 해방이 일시적이라면, 조금 더 지속적인 평온을 얻는 방법은 바로 ‘동정(Mitleid)’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윤리의 유일한 기반이 바로 동정, 즉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끼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동정심은 단순한 감상적 연민이 아닙니다. 이것은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에서 비롯됩니다.
그 통찰이란, ‘나’와 ‘너’를 구분하는 개별적인 자아는 사실상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보기에는 모두 다른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근원에서는 모두 동일한 ‘하나의 맹목적인 의지’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따라서 내가 타인에게서 보는 고통은 결코 남의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나의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그를 도우려 할 때, 우리는 ‘나’라는 이기적인 개체의 감옥에서 잠시 벗어나게 됩니다. 나의 작은 고통과 욕망에만 집중하던 시야가 확장되어, 모든 존재가 겪는 보편적인 고통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순간, 나를 짓누르던 개인적인 고통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우리는 모든 존재와의 깊은 유대감 속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실천하기 자신의 고통에 너무 깊이 함몰되어 있을 때, 의식적으로 시선을 밖으로 돌려보십시오. 주변 친구의 힘든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작은 선행을 베풀거나, 혹은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관한 글을 읽으며 그들의 아픔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4. 궁극의 해법: ‘의지’ 자체의 부정과 금욕주의
쇼PENHOWER가 제시하는 가장 궁극적이고 완전한 해법은 바로 ‘살려는 의지’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해탈’이나 ‘열반’의 경지와 유사합니다.
예술이 의지로부터의 ‘일시적 휴가’이고, 동정이 의지로부터의 ‘일시적 확장’이라면, 이것은 의지 자체를 소멸시켜 영원한 평온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길은 금욕주의(Asceticism)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부, 명예, 육체적 쾌락 등 의지를 자극하고 강화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의식적으로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길은 성자나 고행승처럼 소수의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극단적인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궁극적인 방향성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평온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욕망을 채움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줄이고 의지를 가라앉힘으로써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 실천하기 우리는 성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소극적인 금욕’을 실천해볼 수는 있습니다. 하루 동안 스마트폰을 멀리하며 디지털 디톡스를 해보거나,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거나, 습관적으로 하던 어떤 쾌락적인 행동을 의식적으로 한번 참아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실천들은 우리를 지배하던 의지의 힘을 조금씩 약화시키고, 우리에게 내면의 자유를 선물할 것입니다.
고통을 직시하는 데서 오는 기이한 위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결코 따뜻하고 달콤한 위로를 건네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노력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에게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며, 욕망은 채워질 수 없는 환상이라고 차갑게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의 순간, 이러한 냉철한 진단은 역설적으로 가장 깊은 위로가 됩니다. 그의 철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그 고통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나약하거나 실패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자책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고통은 저기 피어나는 꽃 한 송이의 생존 본능과 다르지 않습니다.”
얕은 긍정의 말이 상처를 덮어두는 임시방편이라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고통의 근원을 정확히 도려내는 외과 의사의 메스와 같습니다. 그는 고통의 본질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가 그 고통의 맹목적인 노예에서 벗어나 그것을 관조하는 현명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는 거짓된 희망의 불빛보다, 어둠의 성질을 차분히 설명해주는 지혜로운 안내자가 더 큰 위안이 될 때가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바로 그런 안내자입니다. 그의 안내를 따라 고통의 실체를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역설적인 평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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