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우리의 오늘
오늘도 어김없이 알람 소리가 고요한 새벽을 가릅니다. 지옥철에 몸을 싣고, 어제와 똑같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켭니다. 끝없이 쌓이는 서류와 이메일, 반복되는 회의와 보고. 마침내 녹초가 되어 돌아온 집에서 잠시 눈을 붙이면, 다음 날 아침은 어김없이 같은 풍경으로 우리를 맞이합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혹은 다람쥐 쳇바퀴처럼. 우리는 매일 비슷한 일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열정과 목표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칩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고생 끝에 과연 무엇이 남는가?’
이것은 단순한 권태나 지루함이 아닙니다. 내 삶의 의미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깊은 실존적 공허함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판 ‘시시포스(Sisyphus)’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영원히 커다란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위는 정상에 닿기 직전,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그는 다시 돌을 밀어 올려야 합니다. 영원히.
이토록 잔인하고 의미 없는 형벌. 20세기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이 절망적인 신화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가장 빛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오늘은 카뮈의 눈을 빌려 ‘시시포스 신화’를 다시 읽으며,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우리의 고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위로와 삶의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형벌에서 반항으로, 비극에서 행복으로
1. 시시포스는 왜 돌을 굴려야 했는가?: 신이 내린 최악의 형벌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시시포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인간 중에서 가장 지혜롭고 신중한 사람이었지만, 신의 의도를 엿보고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결박하는 등 신들의 권위에 끊임없이 도전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이 지상의 삶을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햇살, 따뜻한 바다, 웃음 가득한 나날들을 사랑한 나머지 죽어서 저승으로 가라는 신들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신들은 그에게 최악의 형벌을 내립니다. 그것은 바로 ‘쓸모없고 희망 없는 노동’이었습니다. 신들은 시시포스가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것보다, 그의 영혼이 무의미함 속에서 서서히 파괴되기를 바랐습니다.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운명. 이보다 더한 절망은 없다고 신들은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신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걸 해서 뭐하나, 어차피 내일이면 똑같을 텐데”라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시시포스의 고통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카뮈가 발견한 ‘부조리(The Absurd)’의 의미
카뮈는 바로 이 지점에서 ‘부조리’라는 핵심 개념을 꺼내 듭니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열렬한 외침’과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는 비합리적이고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과 간극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 삶과 노동의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받는지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않습니다. 이 어긋남, 이 충돌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부조리의 각성’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도대체 왜?”라고 묻게 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카뮈에 따르면, 이 부조리를 마주한 인간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 첫째, 육체적 자살: 고통스러운 부조리 자체를 끝내기 위해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카뮈는 이를 문제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라고 일축합니다.
- 둘째, 철학적 자살 (혹은 희망):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조리를 종교나 특정 신념 체계에 귀의하여 해소하려는 시도입니다. ‘내세’나 ‘신의 섭리’ 같은 초월적 희망에 기대는 것이죠. 카뮈는 이것 또한 부조리를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는 ‘지적 기만’이라고 비판합니다.
- 셋째, 반항(Revolt): 카뮈가 제시하는 유일하고 진실한 길입니다. 부조리를 없애려 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 즉, ‘의미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삶을 살아내는 저항의 태도입니다.
3. 시시포스는 어떻게 ‘부조리한 영웅’이 되는가
카뮈는 시시포스를 바로 이 세 번째 길, ‘반항하는 인간’의 화신, 즉 ‘부조리한 영웅’으로 재탄생시킵니다.
카뮈가 주목한 순간은 시시포스가 땀 흘리며 돌을 밀어 올리는 고통의 순간이 아닙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바위가 다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진 뒤, 그 바위를 가지러 터벅터벅 언덕을 다시 걸어 내려오는 시시포스의 모습입니다.
이 순간, 시시포스는 멍하니 걸어가는 노예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그 누구보다 명확하게 ‘의식(意識)’하고 있습니다. 이 바위가 정상에 닿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이 노동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이 희망 없는 형벌이라는 사실을 그는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의식하는 순간’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명철하게 인식함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그 운명보다 우위에 서게 됩니다. 신들이 그에게 강요한 형벌의 의미를 그 스스로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경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경멸함으로써, 그 운명을 이겨냅니다.
신들은 시시포스가 ‘의미 없음’ 때문에 절망하길 바랐지만, 시시포스는 그 ‘의미 없음’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래,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다시 돌을 향해 걸어갑니다. 이 순간, 바위는 더 이상 신들의 형벌 도구가 아니라, ‘시시포스 자신의 것’이 됩니다. 그의 운명은 온전히 그의 것이 됩니다.
그렇기에 카뮈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끝맺습니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의 행복은 환희에 찬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책임지고,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 반항하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처절하고도 장엄한 행복입니다. 의미는 결과(정상에 도달하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항하는 과정, 즉 투쟁 그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4. 오늘, 나의 ‘돌’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삶으로 돌아와 봅시다. 매일 아침 우리를 기다리는 거대한 ‘돌’(업무, 육아, 공부 등)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카뮈의 시시포스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와 지침을 줍니다.
- 첫째, 나의 ‘돌’을 정직하게 직시하기: 지금 하는 일이 지루하고 의미 없게 느껴진다면, 억지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먼저 그 반복성과 무의미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조리를 의식하는’ 시시포스의 첫걸음입니다.
- 둘째, 의식적으로 언덕을 내려가기: 퇴근길 지하철에서, 잠시 커피를 마시는 휴식 시간에, 멍하니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잠시 ‘나의 돌’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나는 오늘 이 반복되는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가?’, ‘이 지루함 속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이처럼 의식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노동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시간은 시시포스가 언덕을 내려오는 성찰의 시간과 같습니다.
- 셋째, 나만의 방식으로 반항하기: 세상이 나의 일에 의미를 부여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그 의미를 창조하면 됩니다. 그 의미는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반복적인 데이터 입력 업무를 한다면, ‘이 무의미한 숫자의 나열’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나는 이 지루한 과업을 누구보다 정확하고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나의 존엄성을 지킨다’고 반항할 수 있습니다. 서류 더미를 정리하는 것은 ‘나의 공간과 시간의 질서를 내가 직접 창조하는 행위’로 반항할 수 있습니다. 의미는 일의 종류가 아니라, 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나옵니다.
행복한 시시포스가 되어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가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언젠가 이 고된 노동이 끝나고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달콤한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더 근본적이고 강력한 위로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의미 없어 보이는 투쟁의 순간이야말로, 당신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자유로우며, 가장 영웅적일 수 있는 순간이라는 깨달음입니다. 당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신도, 사회도, 타인도 아닌, 바로 당신 자신뿐입니다.
매일 아침 당신을 짓누르는 그 거대한 바위를 저주하지 마십시오. 그 바위는 당신을 파괴하기 위한 형벌이 아니라, 당신의 위대함을 증명할 기회입니다. 그 돌을 밀어 올리는 당신의 굳건한 두 발, 땀 흘리는 당신의 등, 그리고 모든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돌을 향해 나아가는 당신의 의지 속에 행복이 깃들어 있습니다.
카뮈의 말처럼,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바로 그 행복한 시시포스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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